[소설-일반]독 짓는 늙은이 by 황순원(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08권)
by 첼시3년 넘도록 손대지 않았던 문학과 지성사의 한국문학전집. 시대와 민족적 배경이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쭉 읽다보니 반복되는 클리셰에 지쳤다. 늘 유사한 전개와 비슷한 결론을 낳는 문장이 마뜩잖아 한동안 쉬었다가 오랜만에 펼쳐본 황순원 단편집. 이번에도 크게 다를 바 없는 작품들의 향연이어서 꾸역꾸역 집어넣는 게 고역이었다. 다음 한국문학전집을 읽는 데에는 꽤나 큰 인내심이 필요할 것 같다.
황순원(1915-2000)
황순원은 1915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났다. 1930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동경 유학 시절인 1934년에 이해랑, 김동원 등과 함께 극예술단체인 '동경학생예술좌'를 창립했다. 1936년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입학했고, 『창작』의 동인이 되었다. 1939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평양으로 돌아왔다가 1946년에 월남했으며, 서울중고등학교 교사와 경희대 문리대 국문과 교수를 역임했다. 2000년 9월 서울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 본저 책날개 인용 및 2차 가공
문학과 지성사의 『독 짓는 늙은이』는 황순원 단편선으로 「소나기」, 「별」, 「겨울개나리」, 「산골 아이」, 「목넘이마을의 개」, 「황소들」, 「집」, 「사마귀」, 「소리」, 「닭제」, 「학」, 「필묵장수」, 「뿌리」, 「내 고향 사람들」, 「원색오뚝이」, 「원색 오뚝이」, 「곡예사」, 「독 짓는 늙은이」, 「황노인」, 「늪」, 「허수아비」 순으로 수록돼있다.
독자가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비상식적 인물들
황순원 작가의 작품은 교과서를 통해 먼저 접했는데 「소나기」, 「목넘이마을의 개」, 「학」 등 다양한 단편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의 소설은 특유의 서정성과 미학적 균형으로 한국 현대문학의 큰 줄기를 이루는 것이라 평가받는다. 그러나 작품 외부에서 바라본다면, 그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특성을 외면하고 단지 소설 내에서의 미적 완결성만을 추구했다는 비판을 받을 여지도 있다.
그의 다른 단편들도 찬찬히 읽어보고나니 머릿속에 또다른 의문이 가득했다. 시적인 이미지로 채워진 작품의 순수한 아름다움만 받아들이기에는 그늘진 이면의 존재감이 꽤나 크게 다가왔다.
상이용사로 돌아온 덕구의 처절한 삶은 그려내지만, 그가 가족을 제대로 부양하기는커녕, 아이를 잉태한 아내의 배를 걷어차 하혈과 함께 조산하게 만든 것은 무심하게 넘기고(「소리」 中), 또다른 작품에서도 역시 한 청년이 애 밴 아내의 배를 찬 적이 있다고 말하며, '쓰러져 배를 안구 낑낑거리며 돌아가는 게 또 어떻게나 미운지 그걸 또 내리찧었지요,'라고 무용담처럼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을 볼 수 있다(「허수아비」 中). 몇 안 되는 단편집에서 아이를 가진 아내에게 폭행을 행사하는 게 별 문제 의식 없이 거듭 등장하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소녀는 그냥 연필을 혀로 가져가기만 하였다. 태섭은 문득 수학 문제보다도 앞에 앉은 건강한 소녀의 혀와 입술에 더 정신이 가 있는 자기 자신을 깨달으면서 저도 모르게 소녀에게서 연필을 빼앗았다. 그러나 태섭도 무엇을 쓰기 전에 연필을 혀끝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중략)... 그리고 옆으로 와 나란히 서는 소녀에게서 제복을 입고 륙색을 메고 스파이크를 들고 한, 소녀와는 다른 완전한 한 여인을 발견하고 당황스레 흐린 하늘로 눈을 돌릴밖에 없었다.
- 「늪」 中
잘 알려지지 않은 단편 「늪」에서는 이러한 인지부조화적 전개가 더욱 두드러진다. 친구 부인의 소개로 가정교사 일자리를 얻게 된 태섭은 소녀를 가르치는 데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이 조카 내지는 딸뻘 되는 소녀의 '여성성'에 정신을 빼앗긴 듯한 모습을 보인다.
소녀는 영악하게 태섭을 홀리는 존재로 묘사되며, 그녀의 입을 빌려 들은 소녀의 어머니는,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는 가여운 전남편과 일편단심 그를 뒷바라지하는 첩을 외면한 독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실상은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외도한 것 때문에 그와 이혼하고 나눈 재산으로 소녀를 기르는 양육자임에도 말이다.
황순원의 표현이 서정적이고 시적인 것은 알겠으나, 이렇게 비상식적인 인물들의 언행을 보면서, 그가 인간 본연의 심성에 대해 제대로 고민하고 작품을 창작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고, 지켜보는 독자로서는 비통해질 뿐만아니라 대단히 소외되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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